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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억

Posted by 집행부 이야기 : 2010/10/25 23:23

어릴 적에 집의 창문이 유리가 아니고 하우스비닐로 되어 있었는데 그땐 몰랐다.
초등학교 들어갈 즈음의 가을에 집 창문을 유리로 바꾸고 엄마가 더 이상 춥지 않겠다고 좋아했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더 어릴 적 기억은 가물가물해서 집안이 추웠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 해 겨울, 당시 MBC의 기상캐스터 아저씨가 김동완 아나운서였는데 영하 21도를 가리키면서 동파와 추위에 주의하라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물론 기상예보 오프닝 음악도.

 

 결국 난 그해에 귀와 볼과 손등에 동상이 걸려서 고생 좀 했다. 지금도 가끔 추운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가려워서 긁게 된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나, 엄마랑 누나와 같이 농협에 갔었다.
그때도 연쇄점이 지금처럼 대체로 가격이 저렴해서 거기만 갔었다.
그 즈음에 블랙로즈라는 초콜릿이 발매되어서 텔레비전에서 선전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의 미니쉘처럼 작은 게 아니고 가로세로 7센티미터 정도의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정사각형이었다.

http://www.adic.co.kr/gate/video/show.hjsp?id=I77279

 

사탕은 싫어해도 초콜릿을 좋아했던 난 연쇄점에서 그 것을 보자, 먹고 싶은 충동이 너무 들었다. 그러나 500원은 너무 비쌌다. 그 때 당시 자장면의 가격은 700원, 시내버스 차표의 가격은 정몽준이가 말하던 70원 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장을 볼 때 보통 3000원, 많이 살 때는 5000원을 썼다. 하지만 어린 나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초콜릿 주위를 맴돌다가 점원들이 안보는 틈을 타 잠바 주머니에 초콜릿을 집어넣었다.
물론 이건 키가 작은 내가 벽모서리 천장마다 붙어 있는 수많은 거울들을 보지 못해서 생긴 부처님 손바닥 안 범죄였다.

 

엄마가 계산하고 있을 때 먼저 나가려고 하던 나는, 초콜릿 주변을 기웃거리던 땟국물 가득한 아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여자점원에게 붙잡혀 죄를 추궁 받았고, 이를 발견한 엄마는 살려고 했던 거라며 점원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에게 먼저 나가라고 했고 나중에 누나와 엄마가 나왔을 때 엄마 손에는 그 초콜릿만 들려있었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엄마랑 누나랑 초콜릿을 쪼개 먹던 게 기억난다. 그 후로 엄마는 그 연쇄점에 다신 가지 않으셨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가 열리면 어디서인가 노점상들이 나타나서 여러 가지 장난감등을 포함해 신기한 물건들을 가져와서 팔곤 했었다. 흔히들 '달고나'로 부르는 설탕으로 만든 ‘띠기’도 하고 싶었고

 

장난감들 특히 무선조종이 되는 자동차가 갖고 싶었지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보자마자 단념하고 화약총에 빨간색 링형 화약을 끼워서 하늘에 쏜 것이 전부였다.
그 화약이름이 홍능8연발 화약 이었던가 그랬다. 

 

 저녁 즈음이 되면 화약도 다 떨어져서 남들이 쓰다 불발나 버린 화약을 주우러 운동장을 다녔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그때는 아이들 운동회 부상으로 공책을 줬었다. 달리기 1등은 세 권, 2등은 두 권, 3등은 한 권, 이런 식으로. 저학년 때는 체구가 커서 달리기를 하면 상위권이었는데 고학년이 될수록 달리기가 션찮아졌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운동회 폐회식 때 전교생에게 3권 정도는 기본으로 줘서 예닐곱 권 정도는 집으로 가져가 다음 학년이 돼서 쓰곤 했다.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에 쓴 일기장을 보면 운동회 때 받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 또 다행이도 수원에 사는 작은 고모랑 삼촌이 두 분 모두 문구, 완구점을 해서 초등학교시절에는 학용품이 아쉽지 않았다.
재만이 아버지께서 재만이를 높이 들면서 “우리 재만이는 열 네 권이구나!”라고 소리치시던 게 갑자기 생각난다. 우린 그 때 다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었다. 재만이는 초등학교 때 모든 운동을 다 잘하던 친구다.

   초등학교 때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팥빵과 한 마리를 넓게 펴서 비닐에 진공 포장한 양념훈제 오징어가 그렇게 먹고 싶었다.

 

흔히 맥주안주로 먹는 제품이다. 4학년 운동회에 외할머니가 운동회에 오셔서 사주셨는데 너무 좋았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 교문리 돌다리에 사셨는데 방학이 되면 꼭 놀러갔었다.
시골에 살다가 도시에 가면 제일 신나는 것은 노점과 포장마차였다.

 

교문리 돌다리는 버스 정거장이기도 했다. 도로 옆과 건물사이의 인도는 2미터도 안되지만 노점상들이 쭉 줄지어 있었고 난 꼭 젓가락에 햄만 꽂아 만든 핫도그를 사먹었다. 그 핫도그는 실제로는 좀 뻑뻑하고 줄줄이 비엔나 보다는 맛이 없었지만 항상 맛있게 보였다. 그리고 우리학교 앞에서는 한 번도 파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맛있게 보여서 아마 더 사먹은 것 같다. 물론 돈은 외할머니가 주신 것이었다.

그때는 할머니에게 놀러가는 것이 너무 좋았고 훈제오징어를 사주셨을 때는 충성을 다할 거라 다짐했는데 지금 이렇게 나이를 먹으니 오라고 해도 잘 안 가게 된다.

사람 참...

참고로 난 할머니의 눈을 많이 닮았다. 친척들 특히 큰외삼촌(할머니를 가장 닮았다)은 우스갯소리로 할머니의 눈이 3대를 망쳤다고 한다. 물론 난 못생겨서 이런 말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만 얼마 전에 관상을 보는 스님이 눈에 매력이 있으니 눈을 소중히 하란다.
얼굴에서 눈이 구십이라 눈을 소중히 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친가로부터 받은 홍염살과 외할머니에게 받은 눈이 내 얼굴의 유일한 매력이라니 더욱 소중히 해야지 싶다.

난 어릴 때부터 식탐도 식욕도 강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다행이다. 태어나서 밥맛이 없었던 날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친척 집에 가면 꼭 냉장고를 열어서 이것저것 신기한 것을 구경하다 먹고 했는데 한 번은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음료수 페트병이 있어서 뚜껑을 열고 두 모금 벌컥벌컥 마시고야 그것이 들기름인 것을 알았다. 반나절동안 니글거려서 입덧을 해대니 외숙모가 냉커피를 타줘서 좀 괜찮아 졌었다.

 

방학이 되면 보통 보름을 넘게 친척집에서 보냈다.

  운동회가 끝나면 보통 다음날이 추석이었다. 추석이면 집에서는 송편을 만들어서 가마솥에 찌고는 했는데 밑에다가 소쿠리를 받치고 그 위에 솔잎이 무성한 소나무잔가지로 빽빽이 채운다음 송편을 얹었다. 조선솔인지 외솔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마 조선솔로 했던 것 같다. 다되면 송편에 붙은 솔잎들을 떼느라 분주하다.

 

그맘때면 밤이랑 도토리도 한창이다. 아침이면 청솔모나 다람쥐가 주워가기 전에 밤새 떨어진 밤을 주우러 갔다. 밤을 줍다가 밤송이가 머리에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헬게이트가 열리는 날이었다. 한 번 지옥문을 열은 후로는 창이 큰 밀짚모자를 쓰고 갔다.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으려면 나쁜 결정을 경험해야 한다는 어떤 리더의 조언이 새삼 생각난다.

 

도토리는 어린 나에게는 밤처럼 맛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도토리묵은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가 굵은 가시나무로 대가리를 만든 곰배로 참나무를 치면 도토리가 후두두둑 떨어지는데 도토리는 맞아도 안 아파서 스릴이 좀 없다.

 

우리는 산에 살았는데 거기는 가문 종종산이었다. 그래서 친할아버지 묘가 집 바로 위에 있었고 추석이 되면 친척들이 성묘를 왔다가 우리가 주운 도토리를 가져가곤 했다. 호박이랑 도토리는 산과 들에 지천이라 아무리 많이 가져가도 아깝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얼굴을 찌푸리겠지만 시골에 살 때 벌레를 참 많이 먹었다. 물론 맛은 그저 그렇지만 단백질 대용으로 먹었었다. 보통 벌초하다보면 장수말벌이나 일반 벌집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는데 집단으로 다 태워 죽인 후 애벌레를 요지로 꺼내어 후라이팬에 볶아 먹거나 아니면 말벌통을 통째로 항아리에 술과 함께 담그면 약주가 된다. 근데 아버지는 목회를 하실 때라 술을 안 드시니 술은 필요가 없었고 애벌레는 다 내차지였다.  

메뚜기 볶아 먹는 것은 다반사였다.

 

이건 좀 생소할 지도 모르겠다. 밤을 주우면 그중에 구멍이 난 밤이 있는데 그런 밤들은 따로 골라서 한 쪽에 모아 1주일 정도 두었다가, 냄비에 찌면 애벌레가 커져서 그 안에 그대로 있다. 그럼 좋다고 티스푼으로 퍼먹었다.

 

그만큼, 어릴 땐 집이 가난해서 고기가 없었다. 콩, 여름에 저수지와 천에서 잡은 붕어, 잉어, 피라미, 새우, 가제 그리고 옆동네에 양계장에서 사온 계란이 전부였다. 그러고 보면 계란 값은 참 안 오른다.

 

그 때 엄마가 계란 한 판 사오라고 하면 2천 원 들고 가서 한 판을 사왔는데 지금은 한 판에 5100원 이니 20년 동안 두 배 반 올랐다. 버스고 자장면이고 다 열배가 올랐는데... 파업할 줄 모르는 계란이 최고다.

 

 이후에는 가을소풍이 있겠는데 가을소풍은 돈이 없어서 몇 번 안갔다. 한 번은 엄마가 아파서 아버지가 김밥을 대신 싸주셨는데 자르면 터질 것 같아서 내가 그냥 가져갔다. 점심이 되어 아이들이 제각기 김밥을 내놓았는데 다들 이쁘고 먹음직스럽게 잘 싸왔더라. 그리고 계살 튀김에 돈까스 같은 것도 싸와서 담임선생님을 드리는데 차마 내 도시락 열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아무도 없는 구석에 가서 열었었다. 김밥이 꼭 갓 태어난 검정색 강아지나 두더지 같았다.

 

남들이 볼까 얼른 먹고 점심시간 내내 숲 속에서 그냥 앉아 있었다. 6학년 때는 가을소풍이 없고 수학여행이 있었던 것 같다. 수학여행은 괜찮았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면 서리가 내리고 겨울이 왔다.

 

아마 나와 동갑이라도 도시에 살았거나 집이 좀 살았다면, 이 이야기가 공감이 안되는 사람들이 꽤 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적어 논다. 잊어버리기 전에. 그리고 이 글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읽을 거라 생각하고...공감되지 않는 사람은 읽지 않을터이니.

오늘 갑자기 이렇게 지나간 일들을 적는 것은 아마도 내가 가을을 타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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